게르니카 장터 광장에서 소들이 여전히 울음소리를 내고 있을 때, 죽음이 금속 날개를 달고 찾아왔다.
게르니카의 지옥불: 하늘에서 내려온 현대전의 서막
전쟁의 역사를 영원히 바꿔버린 세 시간의 공포
1937년, 독일 폭격기들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초토화시켰다. 이는 공포 폭격의 시초가 되었으며, 피카소의 걸작에 영감을 주었다.
월요일 오후 네 시 반을 알리는 게르니카 교회의 종소리가 막 울려 퍼졌을 때, 비행기 엔진의 굉음이 붐비는 장터 광장에 처음으로 들려왔다. 1937년 4월 26일, 이 유서 깊은 바스크 마을은 주간 가축 시장을 찾아온 피난민들과 농부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불과 몇 분 후, 평범한 일상의 장터는 새로운 종류의 공포를 실험하는 시험장이 될 터였다.
콘도르 군단의 하인켈 He 111 폭격기들이 먼저 나타났고, 그들의 그림자가 자갈길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어서 융커스 Ju 52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굉음을 내며 급강하하는 슈투카들이 뒤따랐다. 세 시간 동안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프랑코의 국민파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독일과 이탈리아 항공기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무방비 상태의 민간인 마을에 고폭탄과 소이탄을 퍼부었다.
젊은 어머니 마리아 오르투사(Maria Ortuza)는 훗날 영국 기자 조지 스티어(George Steer)에게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폭탄이 끊임없이 쏟아졌어요. 사람들이 들판으로 달아났지만, 비행기들이 낮게 내려와 기관총을 쏴댔습니다. 동물들은 미쳐 날뛰었어요 — 황소들이 거리를 돌진하고, 말들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스티어가 런던 타임스에 보낸 특파원 기사는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이는 군사 이론가들이 머릿속으로만 상상했던 것, 즉 민간인에 대한 체계적인 공중 파괴를 최초로 기록한 보도였다.
폭격은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종사들은 몇 번이고 되돌아와 마을 중심부를 조직적으로 파괴했지만, 정작 군사적 목표물이라던 렌테리아 다리(Rentería Bridge)와 인근 무기 공장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그들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해가 질 무렵, 화염이 수 마일 밖 바스크 언덕까지 비추었다. 200명에서 300명 사이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 게르니카의 떡갈나무는 300년 된 바스크 자유의 상징으로, 전통적으로 스페인 국왕들이 이 나무 아래에서 지역 자치권 존중을 서약했다. 놀랍게도 이 나무는 폭격에서 완전히 무사했으며, 주민들은 이를 기적이라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