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르트에 강하한 공수부대원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진압하라'는 명령과 함께 민간인 거주 지역 지도를 들고 있었다.
비제르트의 침묵한 총성: 프랑스 식민지배의 마지막 유혈사태
튀니지 독립이 3일간의 학살로 변했을 때
1961년 비제르트 학살에서 프랑스군은 식민 잔존 세력에 맞서 자신들의 도시를 지키던 튀니지인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61년 5월 17일 새벽, 프랑스 공수부대원들이 비제르트에 강하했다. 그들의 군화가 닿은 곳은 파리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해군 기지의 활주로였다. 이후 벌어진 사태는 탈식민화 역사에서 가장 처참하면서도 잊힌 비극 중 하나가 되었다—3일간의 도시 악몽 속에서 천 명이 넘는 튀니지인들이 자신들의 도시 거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튀니지가 독립을 쟁취한 지 5년이 지났지만, 프랑스는 여전히 비제르트의 거대한 해군 시설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곳은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사이 좁은 해협을 장악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은 철수를 요구했다. 샤를 드골은 거부했다. 7월 19일, 튀니지 시민들과 자원병들이 기지 외곽을 포위하고 임시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프랑스의 대응은 신속하고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학살의 씨앗은 두 달 전, 바로 이 5월 아침에 뿌려졌다. 프랑스 군사 기획자들이 '불독 작전(Operation Bouledogue)'의 최종안을 확정한 것이다—튀니지의 봉쇄에 대비한 진압 계획이었다. 제3해병보병연대를 지휘하던 장 그라시외 대령은 기지 울타리에 바짝 붙어 있는 민간인 거주 지역이 찍힌 정찰 사진들을 검토했다. 그에게 내려진 명령은 명확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다로 향하는 통로를 확보하라.
7월 위기가 폭발했을 때, 그 계획들은 현실이 되었다. 프랑스 해군 보병대는 장갑차와 자동화기로 무장한 채 노동자 계층이 거주하는 메디나 구시가지로 진격했다. 튀니지 국가방위대—일부는 사냥용 소총 정도밖에 없었다—는 옥상과 골목에서 맞서 싸웠다. 그 사이에 갇힌 민간인들은 교차 사격의 희생자가 되었고, 더 끔찍한 운명을 맞기도 했다. 프랑스 항공기가 거리를 기총소사했다.
💡 프랑스군은 이 공격 계획에 '불독(Bouledogue)'이라는 암호명을 붙였으며, 위기가 발생하기 수개월 전부터 튀니지 거주 지역 사진을 이용해 시가전 시나리오를 연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