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40년간 잉글랜드 선박을 불태우고, 잉글랜드 병사들을 죽이고, 잉글랜드 법을 무시해왔다—그런 그녀가 이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을 넣으러 온 것이다.

해적 여왕의 마지막 승부수: 엘리자베스 1세와 맞선 그레이스 오말리

아일랜드의 족장이 잉글랜드 여왕과 협상하기 위해 그리니치로 항해했을 때

아일랜드의 해적 여왕이 런던으로 항해하여 엘리자베스 1세와 직접 협상을 벌였다—그리고 승리했다.

1593년 여름, 아일랜드 갤리선이 템스강의 탁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갈 때, 강에서는 오물과 야망의 냄새가 뒤섞여 풍겨왔다. 뱃머리에는 예순셋의 여인이 서 있었다. 대서양의 거센 바람과 수십 년간 잉글랜드 왕실에 맞서 싸운 세월이 그녀의 얼굴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레이스 오말리—그녀의 백성들에게는 그로녀 월(Gráinne Mhaol)로 불린—는 항복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협상하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1530년경, 아일랜드 서해안 클루만(Clew Bay)을 지배하던 해상 영주 오말리 가문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미 자신만의 함대를 이끌고 있었다. 마흔이 되었을 때는 골웨이(Galway)에서 도니골(Donegal)까지의 바다를 장악하며, 어부와 상인들에게서 통행세를 거두고, 적대 부족들을 약탈하고, 잉글랜드 총독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아들들은 잉글랜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녀의 가축은 압류당했다. '조정(composition)'이라 불리는 새로운 잉글랜드 정책—게일족 영주들에게 토지를 왕실에 반납하고 왕실의 권위 아래 다시 하사받도록 강요하는 정책—이 그녀의 권력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레이스는 어떤 아일랜드 족장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 알현을 요청했다.

1593년 5월 18일, 두 여왕이 그리니치 궁전에서 만났다. 그들의 대화에 대한 공식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오직 엘리자베스의 고문들이 준비한 18개의 '심문 조항'과 그에 대한 그레이스의 당당한 답변만이 전해질 뿐이다. 왜 반란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그레이스는 단지 '육지와 바다에서 자신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그리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그녀의 혼인에 대한 질문에는, 고대 브레혼 법에 따라 두 번째 남편을 그의 성에서 내쫓아 버리는 방식으로 이혼했다고 설명했다.

💡 전설에 따르면 그레이스 오말리는 알제리 해적들과의 전투 중 갤리선 안에서 아들 티봇(Tibbot)을 낳았고, 한 시간 뒤 갑판 위로 올라와 반격을 지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