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지도를 그린 그 남자는 지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의 세계가 불타는 것을 지켜본 천문학자: 케플러의 프라하 추방

종교 전쟁이 한 천재를 광야로 내몰았을 때

행성 운동의 법칙을 발견한 천문학자는 단 한 번의 참혹한 여름에 모든 것을—아내, 아들, 후원자를—잃었다.

1611년 8월 3일 아침, 요하네스 케플러는 프라하의 비좁은 숙소 창가에 서서 자신이 11년간 고향이라 불렀던 거리를 행진하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그의 후원자, 그의 보호자, 종교 박해의 먹구름으로부터 개신교 지식인들을 지켜준 그 기이한 군주—는 불과 몇 달 전 퇴위를 강요받았다. 이제 그의 동생 마티아스가 통치했고, 프라하를 천문학자들과 연금술사들, 그리고 이단자들의 안식처로 만들었던 관용은 아침 이슬처럼 사라져가고 있었다.

케플러는 이미 그해 7월에 아내 바르바라를 묻었다. 헝가리 반점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프리드리히도 어머니의 뒤를 따라 무덤으로 갔다. 이제 가톨릭 세력이 권력을 공고히 하고 개신교 학자들이 도시를 탈출하는 가운데, 행성 운동의 법칙을 발견한 그 남자는 완전히 홀로 남겨졌다.

그 아이러니는 잔혹하리만치 절묘했다. 케플러는 루돌프의 궁정에서 10년을 보내며 전례 없는 정밀함으로 하늘의 지도를 그렸다. 그는 티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라는 보물 창고를 물려받아 그것을 우주의 수학적 설계도로 변환시켰다. 그의 '신천문학(Astronomia Nova)'은 행성이 원이 아닌 타원 궤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밝혀냈다—2천 년간 이어진 천문학적 정설에 대한 이단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우주적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지상 피난처가 붕괴하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그해 8월의 그날은 케플러의 방랑의 세월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는 결국 오스트리아 린츠의 직책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의 고난은 배가되었다. 그의 어머니 카타리나는 1615년 마녀로 고발당했고—이 재판은 그의 삶에서 6년을 집어삼켰으며 하마터면 그녀를 화형대에서 불태울 뻔했다. 오직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내세운 그의 끈질긴 법적 변호만이 그녀를 화염으로부터 구해냈다.

💡 케플러는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밤을 미출간 원고를 손으로 직접 필사하며 보냈다. 종교 당국이 그것들을 불태울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 페이지들은 살아남아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