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 아침의 전투가 그리스의 운명을 — 그리고 그리스가 이룩한 모든 것의 생존 여부를 — 결정지었다.

플라타이아: 서양 문명을 구한 전투

페르시아 제국에 맞선 그리스의 최후의 저항

기원전 479년 플라타이아에서 연합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군을 격파했고, 이로써 페르시아의 유럽 진출은 영원히 막을 내리고 그리스 문명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기원전 479년, 마르도니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 — 고대 기록에 따르면 30만 명에 달했다고 하나 현대 학자들은 약 7만 명으로 추정한다 — 는 그리스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다. 아테네는 불탔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 이후 퇴각했고, 마르도니우스에게 육로를 통해 정복을 완수하라는 임무를 남겼다.

끊임없이 분쟁을 일삼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지막으로 단 한 번 힘을 합쳤다. 보이오티아 지방의 플라타이아에서, 약 4만 명의 중장보병 — 스파르타인 8천 명, 아테네인 8천 명, 그리고 수십 개 폴리스에서 온 병력을 포함한 — 으로 구성된 그리스 연합군이 평원을 사이에 두고 페르시아 군대와 대치했다.

전투의 승패는 단 하루 아침의 치열한 전투로 결정되었다. 가벼운 장비와 곡궁으로 무장한 페르시아군은 촘촘히 맞물린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방패를 뚫을 수 없었다. 마르도니우스 본인이 백병전 중에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페르시아군은 순식간에 붕괴하여 패주했다. 플라타이아 전투는 같은 시기에 벌어진 미칼레 해전에서의 그리스 해군 승리와 함께, 페르시아의 유럽 진출 야망을 영원히 끝장냈다.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플라타이아에서 페르시아가 승리했다면 그리스의 민주주의, 철학, 과학 — 훗날 로마와 르네상스, 그리고 계몽주의를 거쳐 세계를 변혁시킨 지적 조류 — 이 모두 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 평가가 옳든 그르든, 플라타이아는 그 결과가 진정으로 역사의 방향을 바꾼 전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 스파르타의 지휘관 파우사니아스는 공격 명령을 내리기까지 몇 시간을 의도적으로 기다리며 부하 장군들의 조바심과 맞섰다 — 그리고 마침내 지형이 그리스군에게 유리해졌을 때, 그의 판단은 옳았음이 입증되었다.